[스포티비뉴스=스포츠팀] 2018년 러시아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 A조리그가 반환점을 돈 지난해 2월, 대한축구협회 수뇌부는 3월 23일 중국과 6차전을 앞두고 걱정이 태산이었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이끌던 한국 축구 대표팀은 2016년 11월 15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벌어진 우즈베키스탄과 5차전에서 2-1로 이겨 3승1무1패, 승점 10점으로 A조 여섯 팀 중 본선 직행권인 2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축구협회 수뇌부는 러시아월드컵 목표와, 이를 달성하기 위한 단계별 장기 계획과 준비는 뒷전에 미뤄둔 채 예선 통과에만 목을 매고 있었다.
축구협회 수뇌부를 만난 참에 가슴 속에 담아뒀던 말을 기름처럼 확 끼얹었다.
"1986년부터 2014년까지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여덟 차례 연속 본선에 오르다 보니 예선 통과를 당연하게 여긴다. 이번에 탈락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떠돈다. 바닥을 확인한 뒤 몸부림을 치면서 판을 새로 짜야 한다는 뜻이다. 축구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오죽하면 이런 말까지 나오겠나."
축구협회 수뇌부의 톤이 높아지면서 속마음을 드러냈다.
"본선에 못 가면 후원기업이 빠져나가 협회의 재정적 기반이 통째로 흔들린다. 본선에만 가면 우리 일은 다한 거나 마찬가지다. 솔직히 지금 본선 성적은 신경도 안 쓴다."
이후 축구협회와 국가대표팀이 겪은 일은 모두가 아는 바다.
이런 인식 속에서 협회는 새 감독을 선임했고, 본선 전략을 세웠다. 슈틸리케 감독 경질 후 대표팀은 여러 차례 중요한 전기를 맞았지만 본선 성공에 초점을 맞춘 판단과 액션 플랜보다는 당시 직면한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근시안적인 결정을 거듭하면서 본선 실패를 예고했다.
신뢰할 수 없는 경기력과 선수 운영으로 팬의 화를 돋구던 슈틸리케 감독은 6월 14일 카타르와 8차전에서 2-3으로 진 뒤 경질됐다. 최종예선이 반환점을 돌던 2016년 또는 2017년 초 사령탑을 교체했어야 하는데 실기를 했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슈틸리케 감독과 동반 사퇴한 이용수 기술위원장 대신 새로 기술위원회를 책임진 김호곤 당시 협회 부회장은 촉박한 일정상 국내 감독으로 방향을 잡은 뒤 허정무 2010년 남아공월드컵 대표팀 감독, 신태용 감독 등을 두고 논의를 거듭한 끝에 신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겼다.
신 감독은 이후 이란, 우즈베키스탄과 9,10차전에서 연속 0-0 무승부를 기록했지만 간신히 본선 티켓을 따냈다. 본선행 확정 뒤에는 거스 히딩크 전 감독의 '대표팀 사령탑 제안설'이 터져나왔으나 결국 본선은 신 감독이 지휘하는 것으로 최종 결론이 났다.
◆ 본선 1승이 목마른 20년 전으로 돌아간 한국축구
신 감독이 이끈 한국은 독일과 러시아월드컵 본선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2-0으로 이겼지만 1승2패로 16강행에 실패했다. 올해와 똑같이 대회 1년을 앞두고 구원투수로 투입된 홍명보 감독이 지휘봉을 쥐었으나 1무2패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2014년 브라질월드컵에 이어 한국은 정몽규 회장 체제로 치른 두차례 월드컵에서 연속해서 녹아웃스테이지 진출에 실패했다.
2002년 4강 신화와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 거둔 첫 원정 월드컵 16강 진출이라는 성과도 모두 까먹었다. 본선 1승을 목표로 애를 태우던 1998년 프랑스월드컵 이전으로 한국 축구의 시계 바늘이 돌아가 버렸다.
지난해 최종예선 당시 일을 되짚어보는 것은 정몽규 회장을 정점으로 하는 축구협회 집행부의 생각, 특히 협회의 핵심 업무인 월드컵 본선을 대하는 접근 자세와, 성적에 대한 의지가 당시와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번 월드컵 성적은 축구협회의 인식 수준과 준비 자세, 딱 그만큼에 그쳤다. 일부 협회 관계자들은 대회 전부터 "러시아월드컵은 참가에 의미를 둘 수밖에 없는 대회"라는 말을 하고 다녔다.
차범근 전 대표팀 감독이 등장하는 맥주 광고의 카피처럼 협회와 대표팀은 '이길 수 없는 상대는 없다'는 신념을 갖고 본선에 나섰어야 했다. 이를 바탕으로 8강이든, 16강이든 목표를 정하고, 예산을 배정하고,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와 지원스태프를 구성하고, 선수를 선발하고, 훈련과 평가전을 준비하고, 목표 달성을 위한 플랜A와 돌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플랜B를 수립해야 했다. 그러나 이번 대표팀은 준비 과정 곳곳에서 문제를 드러냈다.
대회 후 습관처럼 실패의 책임을 감독에게만 돌리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지만, 감독 선임은 축구협회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다. 이번 대표팀의 성적은 정몽규 회장 집행부의 비전, 맨파워, 목표 설정과 이를 뒷받침하는 역량이 총체적인 평가를 받는 근거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신 감독의 실패는 축구협회 수장인 정 회장의 허물이자 리더십의 한계일 수밖에 없다.
◆ 신태용 감독의 실패는 정몽규 회장 리더십의 한계
정 회장을 가까이에서 본 축구인들은 '강약과 템포가 없고, 결단하지 않고 시간을 끌다 골든 타임을 놓치거나, 몇몇 측근에 의존하는 폐쇄적 의사 결정'을 리더십의 특징으로 요약한다.
정 회장 재임 기간 중 축구협회와 한국축구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몇가지 사례를 보자.
지난해 9월 월드컵 본선행을 확정한 뒤 터진 히딩크 전 감독의 ‘한국 대표팀 사령탑 제안설’과 협회의 대처는 정 회장의 리더십과 여기서 파생된 행정 난맥상을 생생히 보여줬다. 노제호 거스 히딩크 재단 사무총장이 '한국대표팀 사령탑을 맡을 수 있다'는 히딩크 감독의 ‘의향’을 김호곤 기술위원장에게 전했다고 주장한 뒤 김 위원장이 이를 부인하면서 격화된 논쟁은, 김 위원장의 SNS에서 노 총장이 보낸 문자 메시지가 확인되면서 ‘거짓말 논란’으로 비화됐다.
눈높이가 본선 진출에만 맞춰져 있다가 목표 달성에 안도의 한숨을 쉬던 축구협회 수뇌부의 귀에 히딩크 감독의 목소리를 비롯해 본선 성공을 위한 갖가지 제안들과 국민의 염원이 들릴 리 없었다. 피지컬 코치 영입 시기는 점점 뒤로 밀려 대표선수들의 체력 관리 등 핵심 업무를 장기 계획 속에서 진행하지 못하게 했다. 이 부분은 결과적으로 스웨덴, 멕시코전 패배의 가장 큰 요인이 됐다. 4년 전 브라질월드컵 실패 뒤 제기된 멘털 코치 영입 계획도 끝내 없었던 일이 됐다.
월드컵 최종예선 뒤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16강 진출은 커녕 본선 조별리그 3전 전패를 할 수도 있다는 비관적인 전망이 압도적인 가운데, ‘구두 약속’을 근거로 최종예선 마지막 두 경기에서 믿음을 보여주지 못한 신 감독을 본선을 지휘할 대표팀 사령탑에 밀어올린 것도 본선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비전과 이를 뒷받침할 실행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 회장의 리더십 문제는 2016년 12월 문화체육관광부의 의뢰에 따른 경찰 수사로 드러난 축구협회 전현직 임원들의 비리 사건 처리 과정에서도 드러났다. 축구협회는 경찰 수사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1년 가까이 인사를 통한 조직 쇄신을 하지 못하고 어정쩡한 상태를 유지했다. 월드컵 예선 등 중요한 일이 이어지는 가운데 협회 행정은 표류했다. 정 회장은 지난해 11월 홍명보 전무 영입 후 후속 인사를 단행했지만 이미 타이밍을 놓쳤다는 비판을 받았다.
◆ 2연속 월드컵 본선 실패, 정몽규 회장의 책임은?
한국 축구 역량의 대외적 상징인 월드컵 성적과 함께 건강성을 살필 수 있는 지표인 K리그도 팬의 신뢰를 잃고 표류하고 있다. 특히 2016년 5월 터진 전북현대의 심판 매수 사건과 후속 처리 과정은 축구계에 큰 상처를 남겼다.
2013년 전북 스카우트 차모씨가 K리그 심판 2명에게 현금을 건넨 이 사건에 대해 한국프로축구연맹은 2016년 9월 벌금 1억원과 승점 9점 삭감이라는 솜방망이 징계를 내렸다.
전북에 대한 징계는 프로연맹 소관이지만 산하 연맹에 대한 관리 감독은 축구협회의 몫이다. 당시 전북 사건 관련 프로연맹의 징계 보고서를 접한 축구협회 수뇌부에서는 징계 수위가 너무 낮다며 징계안을 프로연맹으로 돌려보내 원점에서 재검토하도록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정 회장도 처음 징계 내용을 보고받고 크게 화를 낸 것으로 알려졌으나 어쩐 일인지 최종 결과는 ‘징계안 승인’이었다.
이 징계는 결과적으로 전북이 처절한 반성 끝에 밑바닥에서 새로 출발해 ‘심판 매수 구단’이라는 주홍글씨를 스스로 지울 기회를 박탈했고, K리그 전체의 신뢰도를 떨어뜨렸다. 결국 지난해 6월 심판을 매수한 실무자였던 스카우트 차모씨가 전주월드컵경기장 관중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충격적인 비극으로 이어졌다.
대회 준비 과정부터 기대 이하의 저평가 속에서 속을 끓이던 신 감독이 결국 실패하고, 이에 대한 무한 책임을 져야 하는 정 회장의 리더십에 대해 많은 축구인과 팬은 심한 피로감과 강한 의구심을 드러내고 있다.
홍명보 전무가 축구협회의 대대적인 개혁 방안을 곧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현장 축구인과 팬은 협회의 최고 책임자인 정 회장의 거취 표명 등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내용이 담기지 않으면 또한번의 위기 봉합용 처방일 수밖에 없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다.
정 회장이 이번에는 적접 나서 실패에 따른 책임을 지는 자세를 보일까, 그동안 숱하게 봤던 것처럼 협회 조직과 실무 행정 책임자의 등 뒤에서 여론의 동향을 살필까. 축구인과 팬은 정 회장의 결단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스포티비뉴스 스포츠팀(류재규, 한준, 정형근, 박주성, 조형애, 김도곤, 유현태, 이종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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