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 월드컵에서 독일을 2-0으로 잡는 등 투혼을 펼친 한국은 새 사령탑 선임과 약간의 세대교체 작업을 거쳐 2019년 아시안컵 우승에 도전한다.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 출전한 AFC(아시아축구연맹) 대표 주자 5개국 가운데 A조 사우디아라비아는 1승2패(3위), B조 이란은 1승1무1패(3위). D조 호주는 1무2패(4위), F조 한국은 1승2패(3위), H조 일본은 1승1무1패(2위→16강 진출)로 나름대로 선전했다. 유럽과 남미가 단단하게 이뤄 놓은 세계 축구의 양대 산맥이 건재한 가운데.

이들 5개 나라를 비롯한 AFC 산하 24개국은 내년 1월 5일부터 2월 1일까지 아부다비 등 아랍에미리트연합(UAE) 4개 도시 6개 구장에서 아시안컵을 놓고 겨루게 된다.

1960년 출범한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아시안컵)는 UAE 대회가 17번째로 대회 사상 가장 많은 24개국이 본선에 올라 있다. 한국이 속한 C조의 필리핀과 A조 인도, B조 팔레스타인, F조 투르크메니스탄 등은 축구 팬들에게 다소 낯선 나라들이다. 그동안 이들 나라들과 축구 교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들 나라 최근 경기력이 주요 대회에서 한국과 만날 만한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신생국 팔레스타인은 2010년 광저우 아시아경기대회에서 23세 이하 대표 팀간 경기만 있긴 하다.

축구 팬들이 잘 알고 있듯이 한국은 아시안컵 초창기 강호로 이름을 떨쳤다. 그때 붙은 별명이 ‘아시아의 호랑이’다. 이 대회를 비롯해 그 무렵 한국 대표 팀 주전 공격수로 활약한 최정민 선생 별명이 ‘아시아의 황금 다리’였다. 당시 상황을 보면 그럴 만하다.

홍콩에서 열린 제1회 대회에는 개최지 홍콩과 지역 예선을 통과한 한국, 월남(남베트남), 이스라엘[1980년대 초 쿠웨이트 등 서아시아 나라들에 의해 밀려나기 전까지 아시아 지역에서 스포츠 활동을 했다. 이후 EOC(유럽올림픽위원회)와 UEFA(유럽축구연맹) 등 유럽 지역으로 옮겨 갔다]이 출전했다.

한국은 1차전에서 홍콩과 2-2로 비겼다. 비긴 배경을, 그 무렵 한국 축구의 열악한 환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소개한다.

지역 1차 예선을 부전승으로 통과한 한국은 지역 2차 예선에서 필리핀을 2-0(마닐라), 3-0(서울)으로 가볍게 제쳤다. 지역 최종 예선에서 맞붙은 상대는 자유중국(오늘날 대만)이었다. 한국은 서울 홈경기에서 2-0으로 이겼다. 이어 타이페이에서 원정 경기를 갖게 됐는데 비용 문제가 골칫거리였다.

대한축구협회 재정이 워낙 빈약해 당시 국적기인 KNA를 외상으로 타는 촌극이 벌어졌다. 요금은 예선이 끝난 뒤 자유중국과 친선경기를 치러 그 수입금으로 갚기로 했다. 2차전에서 한국은 자유중국을 2-1로 누르고 본선에 올랐다. 그런데 비 때문에 친선경기가 취소됐다. KNA가 오기를 기다려[당시 김포~타이페이~홍콩 노선은 주 1회 운항됐다] 경기 당일 새벽 가까스로 홍콩에 도착했다. 나중에 갚긴 하지만 이 비행편도 외상이었다.

짐을 풀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경기장으로 갔으니 홍콩전에 나서는 선수들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초반 연속 2골을 내주고 말았다. 이제 졌는가 싶었을 때 반전이 일어났다. 갑작스레 비가 쏟아져 선수들이 생기를 되찾았다. 한국은 2골을 만회해 가까스로 무승부를 기록했다.

이후 이스라엘을 2-1, 월남을 5-3으로 꺾고 아시안컵 초대 챔피언이 됐다.

대회를 치르기 위해 효창공원 안에 잔디 구장을 만드는 등 많은 준비를 한 1960년 제2회 서울 대회에서는 월남을 5-1, 이스라엘을 3-0, 자유중국을 1-0으로 물리치고 가볍게 정상에 올랐다.

두 대회 사이에 열린 1958년 도쿄 아시아경기대회 축구 결승전에서 한국은 자유중국에 2-3으로 져 금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그 무렵 자유중국은 한국과 승패를 주고받을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었다. 그때 자유중국 대표 선수들은 홍콩 프로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이었다고 한다. 본토와 교류가 없을 때이니 홍콩 선수들이 자유중국 유니폼을 입고 뛴 것이다.

1964년 이스라엘에서 열린 제3회 대회에서 개최국 이스라엘에 1-2, 인도에 0-2로 지고 홍콩을 1-0으로 눌러 3위를 차지한 게 이후 한국의 대회 3위 통산 4번의 시발점이 됐다. 1972년 제5회 태국 대회 준우승은 이후 대회 2위 통산 4번의 출발이었다. 한국은 2015년 제16회 호주 대회 현재 우승 2회와 준우승 4회 3위 4회로 일본(우승 4회)과 사우디아라비아(우승 3회 준우승 3회), 이란(우승 3회 3위 4회)에 뒤져 있다.

1988년 제9회 카타르 대회 결승전에서 사우디아라비아와 0-0으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3-4로 지는 등 우승과 인연을 맺지 못하면서 아시안컵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던 한국은 1996년 제11회 UAE 대회 8강전에서 알리 다에이가 페널티킥을 포함해 4골을 터뜨린 이란에 2-6으로 지는, 한국 축구사에 오욕의 기록을 남겼다.

한국의 최다 스코어 차 패배 기록은 1948년 런던 올림픽 스웨덴과 8강전 0-12인데 이는 일제 강점기에서 막 벗어난 한국 축구 초창기 일이고 런던으로 가는 여정이 험난했다는 점에서 이란전 참패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아시안컵은 이처럼 한국 축구에 명과 암을 안긴 대회로 축구 팬들에게 인식돼 있다.

새 사령탑 선임과 일부 주전 선수 대표 팀 은퇴에 따른 세대교체 작업 등을 슬기롭게 이루고 반세기가 넘는, 59년 만의 아시안컵 우승을 축구 팬들은 바라고 있다.

직전 대회인 2015년 제16회 호주 대회 결승전에서 호주에 연장 접전 끝에 1-2로 지는 등 선전한 결과는 오래전에 내준 아시안컵 탈환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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